일요신문 2000년 3월

수사참여 국내 법의학자들 국제망신 위기


최근 이씨 사건에 대한 환송심 재판이 이어지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입장에 선 사람들은 다름아닌 국내 법의학자들이다. 변호인측이 초빙한 외국의 법의학자들이 국내의 대표급 법의학자들이 내논 견해에 대해 '무차별 공세'를 폈기 때문이다.

외국의 법의학자들은 이씨 사건에서 쓰인 시반과 시강, 그리고 위 음식물에 의한 사망시간 추정법이 '여러가지 추정법 가운데 가장 믿지 못할 방법들'이라고 혹평했다. 검시보고서에 사체의 직장온도조차 적혀 있지 않은 사실을 두고 국내 법의학자들을 법의학의 'ABC'도 모르는 사람들로 여기기도 했다.

수치감 때문일까. 이번 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던 한 법의학자는 "창피해서 앞으로 국제학술대회에 어떻게 나갈지 걱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국내 법의학자들이 속을 태우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실력' 때문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검시제도 때문에 외국 법의학자들에게 '두수쯤 아래'로 비쳐진 게 억울하고 분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변호인측에 자문을 해줬던 외국의 저명한 법의학자들은 대부분 우리와는 달리 영미법계의 전담검시제도가 정착된 나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나라에는 검시를 담당하는 전담자(검시관)가 따로있어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감식과 검시가 이뤄진다.

이들 검시관들은 초동수사 단계에 현장으로 달려가 가장 원형에 가까운 사체에 대한 정보를 취합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선 검시관들이 사체에 대한 부검결정권과 수사권 등을 지니고 있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른바 대륙법계의 '겸임 검시제도'를 고집하고 있다. 검찰이 변사체에 대한 검시를 책임지며 부검은 법의전문가를 비롯한 의사에게 의뢰하는 방식이다. 전문적인 법의학자들이 설 땅이 그만큼 척박한 편이다.

한 법의학자는 "부검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부검 사진을 놓고 사체현상을 판단해야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토로하기도 한다. 이번 이씨사건에서도 법의학자들은 최씨의 사체 사진 몇장만을 보고 시반에 대한 의견을 내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점 때문에 지난 20여년 동안 법의학계는 정부에 꾸준히 '검시관제도'의 도입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어느 정권도 검시관제도를 과감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검시관이란 자리가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들이 벌이던 수사권 영역 다툼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었다는 것.

이씨 사건에 관여했던 한 법의학자는 취재진에게 대한법의학회 명의의 건의서 한 통을 보여줬다. 지난 98년 1월 행정개혁위원회 앞으로 보냈지만 무용지물이 된 것이었다. 검시관 제도의 도입을 역설한 그 건의서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한 국민이 억울하게 사망하였거나, 인권이 침해당하는 일이 없었는가. 이를 가려내는 것은 국가적인 의무의 이행이다. 그리고 그 일은 적절한 검시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사망자인 20만~25만명 중 검시 대상이 되는 변사체는 1만~1만2천5백명 정도. 이 가운데 부검을 통해 사인이 규명되는 것은 6천~7천명뿐이다.'

송영철 기자


처음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