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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Knight
사망 후에 체온이 점차적으로 하강한다는 일반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태고 적부터 인정받았지만, 그러한 현상을 과학적인 위치로 정립한 최초의 시도는 영어로 쓰인 저술에서만 따진다면 19세기 중반으로 보인다. 1839년 런던에서는 의사 존 데이비(John Davey)가 저술한 「생리학과 해부학에 대한 연구」라는 책이 출판되었고, 그 안의 13장에서는 ‘사망이후 체온변화에 대한 관찰’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서 저자는 1828년 Malta에서 8명의 영국 군인을 대상으로, 이어 그가 좀더 서늘한 기후인 British Isles에 돌아온 후에 다른 10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체온에 대한 온도측정실험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 당시의 원시적인 설비와 그가 이 분야의 개척자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데이비의 방법론과 결과에 대한 통찰력은 가히 현대적이다. Malta에서 사망 후 곧 시체는 상대적으로 균일한 환경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수의만 입힌 채 큰방에 있는 나무로 된 탁자 위에 놓여졌다. 데이비는 모든 경우에 대기온도를 측정했다. 아마도 수은구라 여겨지는 것으로 화씨 온도로 눈금을 정했다는 것 이외에 그의 온도계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없다. 그를 따른 다른 연구자들과 달리 데이비는 측정부위를 인체의 한 부분에 국한시키지 않고 조직내의 다양한 부위를 측정했다. 피부, 구강, 겨드랑이, 직장의 온도는 측정되지 않았고, 측정은 부검을 하는 동안에 기록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측정은 사망 후 3-29시간사이에 이루어졌고 대부분이 사망 12시간 이후에 이루어졌다. 데이비는 그의 데이터로부터 사망시간을 추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Malta에서의 연구에 대한 논고의 대부분은 몇몇의 시체에서 발견된 108°F 심지어 113°F까지 이르는 상당한 고열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은 고온기후나 보통의 전염성 사망원인에 기인한다고 결론지었고, 한편 장기와 조직에서 일어나는 사망 후 열 생성과 관련한 장시간에 걸친 성찰을 시작했다. 그러나 데이비는 몇몇 토론을 거친 후에 이 같은 가정을 부인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 그는 좀 더 온난한 기후에서 측정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켄트(Kent)에 있는 캐썸 병원에서 죽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수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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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지 얼마가 지났는가에 대하여 종종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고려하고 체온, 특히 심부의 체온에 주목함으로써,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사실에 접근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증거로서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비록 첫 부분은 지나고 나서 보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마지막 언급은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그의 마지막 경고는 책이 쓰여진 지 1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유효하다. 이러한 관찰들은 사망발생과 사후 관찰사이의 시간이 의심스러운 경우에 있어 비슷한 시도를 하며 분석적으로 추론하는 탐구자가 상당히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다. 의사가 의견을 요청 받았을 때 법관과 그 자신이 숙고한 나머지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할 수 있으려면 그가 온도에 영향을 줄 만한 환경을 식별하는 데 있어 많은 판결과 훌륭한 판별력은 필수항목일 것이다. 데이비 이후 곧 미국 필라델피아의 「법의관(The Medical Examiner)」라는 저널에서 간단한 기록들이 출판됐는데, 현대 의학 검시관의 직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다만 일반적인 의학 출판물이었다. 1845년 6월에는 「내과, 외과에 대한 웨스턴 저널(Western Journal of Medicine and Surgery)」1844년 6월, 10월호에 게재된, 뉴올리언의 의사 다울러(Bennett Dowler)가 다양한 시체의 체온 측정에 대해 쓴 논문의 초록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추가된 정보에 따라 1845년 8월, 9월, 10월에 연재됐다. 그의 주된 관심도 또한 데이비가 언급했던‘사후 온열력’- 빈번한 사후 체온의 현격한 상승 - 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부위의 체표와 내부 둘 다에서, 시간 간격을 두고 온도를 측정했다. 그는 Fahrenheit와 Reaumur을 혼합하여 기록했지만 그의 온도계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그의 자료를 법의학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울러의 출판물에 촉발되어 필라델피아의 「법의관(The Medical Examiner)」1846년 1월호에는 오하이오의 마리에따에 있는 의사 헨슬리(Benzamin Hensley)의 논문이 실렸다. 그는 다울러가 언급했던, 한쪽 끝에 수은구가 달리고, Reaumur도가 표기된 더 작은 실린더를 감싸고 있는 큰 유리실린더로 구성된 온도계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비등점과 냉각점은 오차 0.5도 이내로 정확했다. 헨슬리는 피부, 겨드랑이, 직장, 질, 팔꿈치 앞 함요, 근육, 내장 아래 등을 포함한 다양한 부위에서 온도를 측정했다. 그는 다른 시간 간격으로 측정을 반복하여 상당한 양의 데이터를 구축했지만 실제로 그것을 활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체임시보관소’에서 온도를 측정하였고, 또한 어떤 경우-아마도 그가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았던 그의 부모의 경우-에는 사망 몇 시간 전에 측정하기도 하였다. 사후 간격에 대한 이러한 무익한 초기의 시도들 이후 17년이 흐르고서야 다시 그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1863년 런던에서 내용이 있는 논문이 출간됐는데, 이 논문이 데이비, 다울러, 헨슬리를 인용하고 있음에도 이 분야에서 가장 최초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하여튼 이것은 그 주제의 법정인 관점에 초점을 둔 최초의 영문 출판물이었다. 이것은 Guy 병원의 테일러와 윌크가 쓴 긴 논문으로 그들 병원의 보고서에 실렸다. 테일러(Alfred Swaine Taylor)는 가이(Guy) 병원의 법의학 강사였고, 1865년 처음으로 출간되어 한 세기동안 영어로 된 법의학 최고의 교재였던, 유명한「테일러의 법의학 원론과 실습」의 저자이다. 그 논문은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사후 시체 냉각에 대하여-사망시각에 대한 추정: 100가지 경우에 있어서 온도관찰’이라는 긴 표제를 가지고 있다. 30페이지의 논문은 대체로 일화적이고, 산만하며, 매우 흥미롭긴 하지만 과학적 관점에서는 다소 실망스럽다. 초반에 7-8페이지는 제목과는 거의 무관한 부패작용에 대해서만 몰두하고 있다. 테일러와 윌크의 실험결과는 몇 가지 중요한 실수들로 인해 오점을 남기고 있는데, 19세기 중반에 사용됐던 설비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수백 개의 온도 측정치 거의 모두가 ‘아무 것도 감싸지 않는 온도계의 노출된 수은 구를 복부의 피부 위에 둠으로써’측정됐다. 이점은 매우 불만족스러운데, 왜냐하면 온도 측정치가 대기온도, 가끔 일어나는 통풍, 습도, 그리고 곡선모양의 수은 구의 복부와의 접촉면적의 가변성-그러한 피부의 작은 영역과 깊은 조직의 온도와의 다양한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에 의해서 변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실수는 이 논문에서도 인정했는데, 일련의 100가지 경우 중 첫 27 경우에서 저자는 시체가 병동에서 ‘시체 임시 보관소’에 언제 이송됐는지에 대한 기록을 빠뜨려서 얼마나 오래 환경 온도에 노출됐는가를 절대로 알 수가 없다. 4개를 제외한 수백 개의 측정치는 피부표면에서 측정됐으며, 결과들은 4개의 영역으로 분류됐다. : 사망 이후 2-3, 4-6, 6-8, 12시간 이상. 각 그룹 내 온도의 변화량이 크고 또, 각 그룹의 크기가 29-76으로 다양했기 때문에 결과들의 통계학적 유효성은 매우 한계가 있다. 이전의 저자들처럼 테일러와 윌크는 사망시간을 추정하기 위해 그들의 데이터로부터 어떠한 법칙을 유도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일반론과 수많은 일화적 사례 중에는 몇몇 흥미로운 관찰과 고찰이 있다. 이전의 저자들처럼 테일러와 윌크는 때때로 사후에 체온이 상승하는 경우가 있다고 언급하고, 이것의 가능한 메커니즘에 대해 토론했다. 물론 그것에는 흔한 사인이었던 빈번한 감염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그렇게 명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체온의 ‘정체상태’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훗날의 연구에 매우 중요하게 된 논란을 여전히 발생시키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냉각을 촉진하는 데 있어 환경, 의류, 액체에 담그는 것의 체온에 대한 영향에 대해 토론했다. 피부가 냉각된 이후에도 시체 내부는 온난하게 남을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뿐 아니라 내부로부터 표피에 이르는 온도 등급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도 최초로 토론했다. 두 가지 다른 현상이 다른 저자들로부터 인용됐는데, 이는 법적인 신화로 바뀌어버려 여전히 오늘날의 몇몇 교과서에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나타난다. 아무리 테일러와 윌크에게 공정하게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저자들의 주장을 다소 각하 시켰다. 첫 번째 신화는 참고문헌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같은 1863년에 저술된 의사 리차드슨(D. B. Richardson)의 논문으로부터 인용했다. 그는 ‘내출혈이든 외출혈이든 또는 기절한 경우처럼 일시적으로 혈액이 심장으로부터 빠져나가든 출혈로 인한 사망의 경우에서처럼 혈액의 손실은 체온의 급속한 냉각의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테일러와 윌크는 ‘여기에서는 갑작스레 체온이 급강하는 것과 천천히 점진적으로 시체가 식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직접적이고 완전한 출혈로 인해 사망했다면 체표가 주변 대기온도로 냉각되는 것은 2시간이내에 완료된다.’라는 리차드슨의 주장에 대하여 그들은 ‘이는 심각한 오류에 이르게 할 수 있고, 결백한 사람을 살인사건에 연루시킬 수 있다.’고 논평했다. 두 번째 신화는 니스텐(Nysten)을 인용했는데, 이 또한 참고문헌은 제공되지 않았다. 니스텐은 ‘목매달아 질식하거나 질식사, 또는 일산화탄소의 흡입 등으로 사망한 경우 시체는 사망 24-48시간 후에도 냉각되지 않고 때로는 3일 후에도 완전히 차갑지 않다’고 주장했다. 테일러와 윌크는 이러한 진술에 대하여 ‘이 진술에 대해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치명적인 질식사의 경우에는 시체는 다른 사인의 경우 만치 빠르게 냉각되는 것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이다’라고 비난했다. 한편, 이러한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비판은 같은 논문의 다른 곳에서 부정됐는데, 저자들이 창문 셔터에서 넥타이로 매달아 죽은 Conde 왕자, Bourbon 백작의 사망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목매달아 질식한 경우에는 다른 경우들보다 체온이 오래 유지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사고나 급성질환 또는 졸도 등으로 급사하게 되면, 시체는 종종 더 장시간 열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근거 없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비록 테일러와 윌크의 논문은 사후 체온에 대한 최초의 저술로 갈채 받아 왔지만, 사실상 최초의 것도, 특별히 박식한 것도 아니다. - 비록 그 당시 의사와 환자들의 실상에 대해 소상히 등불을 밝혀주는 19세기 중반의 런던의 수 백가지 흔한 사인에 대한 기록과 빅토리아 시대의 일련의 일화들처럼 다른 분야에서는 대단한 흥밋거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3년 뒤 중요한 문헌이 나왔고, 이는 과학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1868년에 Glasgow대학 법의학 교수였던 레이니(Harry Rainy)에 의해 저술됐다. 그는 명료한 사고로 집필했고, 그 분야에 대한 많은 현대적 논문과 적어도 동등한 수준의 수학을 사용했다. 레이니는 이전 저자들의 출판물에 대해 인정하고, 그 자신의 데이터 수집을 Glasgow 왕립 부속 진료소의 조셉 코우트(Joseph Coates)의사에게 공을 돌렸다. 그들은 100개 시체의 복부 피부와 직장 온도를 측정했지만, 분별력 있게 직장의 기록만을 신뢰하여 표면에서의 기록을 버렸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실험도중 시체임시안치소의 온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54가지 경우를 인정하지 않았다. 각 시체별로 사후 30분~63시간 사이에 4번 혹은 5번 연속적으로 체온이 측정됐다. 그리고 나서 레이니는 1시간 뒤 온도보다 초과되는 온도 비율을 표시함으로써 각 수치에 대해 ‘시간당 냉각 비율’을 계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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