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나는 또다시 신임교사가 된다
양은미 마리아 | 수원교구 죽산본당 중고등부 교사
새천년의 봄은 무엇인가 다를 것만 같았는데…….
따스한 햇살은 꽝꽝 얼어붙은 얼음을 녹이고 싱그런 2월의 비는 촉촉이 대지에 스며들어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뼛속까지 시리다는 꽃샘 추위는 나의 몸을 더 이상 웅크리지 말라며 매섭게 후리고 간다. 이렇듯 새천년의 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살며시 다가왔다. 2001년 봄, 난 또다시 파릇한 신임교사가 된다.
대희년. 밀레니엄. 21세기의 문턱. 왁자지껄. 2000년의 희망이 들끓었던, 꽤 분주하고 사람들의 마음마음마다 설레임이 자리잡고 있었던 1999년 12월의 겨울. 나 역시 무엇인가 부푼 설레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해 겨울 내게도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2000년 대희년으로 시작된 주님의 사랑이.
주님께서 내게 주신 첫 번째 사랑은 냉담을 하던 나를 다시금 성당으로 인도하심이었다.
성당을 멀리하고 점차 내 자신을 합리화시켜 가며 내 안에 담을 쌓던 그 시기. 3년간의 냉담은 나에게 나태와 자만심도 심어 주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나의 갈증을 불러일으킨 시기이기도 했다. 3년간의 냉담에 갈증을 느낀 나는 무의식적으로 성당을 찾았고 미사를 드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에 나는 다시금 주일 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두 번째 사랑은 하느님께서 나를 교사로 임명하심이었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께서 “은미는 커서 뭐가 될래?” 하고 물으시면 난 “선생님이 될래요.” 하며 수줍은 듯 이야기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렇듯 나의 꿈은 실현된 것이다. 처음 교사를 시작하며 나는 신앙의 달콤함에 젖어 생활했다. 주님의 은총이 충만함을 느꼈고, 더 이상의 무엇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난 한낱 어리석은 인간이었기에 그 이상의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신앙의 달콤함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고통도 있다는 것을…….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의 생활은 참 분주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교사들은 각자의 일과를 마친 오후에 성당에 모이는 것을 당연시했다. 참 피곤했을 텐데도 선배 선생님들의 얼굴엔 늘 미소가 엷게 번져 있었다. 그렇게 3, 4, 5월도 가고 싱그런 6월이 다가왔다. 6월은 여름 신앙학교 준비로 무척 바빴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예산을 뽑고 교안을 발표하고 이렇게 6월도 지나고 드디어 7월이 되었다. 아이들이 방학을 했고, 여름 신앙학교가 시작되었다.
♬모여라 모두 모이자 모두 이제가 시작이다~~♬
음악에 맞춰 율동을 하고 조를 짜고 조 이름, 조 구호를 정하고 아이들과 함께한 생활은 참 즐거웠다. 나를 믿고 따르는 아이들을 볼 때면 더욱. 우리의 여름 신앙학교 장소는 용인시에 위치한 관광농원이었다. 산과 냇가가 있었고 무엇보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참 조용한 곳이었다.
여름 신앙학교에서의 첫날은 순조로이 지나갔다. 그러나 둘째 날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더니 점심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라서 그치려니 했지만 저녁이 되어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숙소가 위치한 곳은 산 바로 아래의 통나무집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한낮의 비는 폭우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저녁식사를 하던 중 전기는 끊기고 말았다. 갑자기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과 두려움. 혹여 아이들이 걱정되어 나를 비롯해 몇몇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게임을 했다. 그렇지만 왜 그리 두렵던지 ‘주님! 이 두려움을 없애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며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다.
잠시 후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비가 이렇게 계속 퍼붓는다면 산사태가 일어나 우리 숙소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초조감은 밀려왔고 우린 이곳을 벗어나기로 마음 먹었다. 혹 폭우로 길이 끊기진 않았나 싶어 시내로 나가는 길을 살폈다. 아뿔사, 폭우로 인해 개울물이 넘친 것이다. 우린 그야말로 용인의 한 작은 관광농원에 고립되고 만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킵시다.” “선생님!! 손전등 어디에 챙기셨어요?” “상자에 넣었는데요.” “어두워서 안 보이네요.” “선생님!! 비닐봉지 어디에 있죠?” 어둠 속에서 단 한 개의 불빛에 의존하며 우린 재빨리 아이들의 짐을 챙겼다.한편 수녀님께서는 아이들을 어둠으로부터 진정시키기 위해 촛불에 의지하며 여러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렇게 짐을 다 챙기고 관광농원 주인 아저씨의 배려로 공터가 있는 안전지대로 대피했다. 다행히도 그곳에선 전화가 어렵게 연결되었고 우린 본당에 모두다 무사함을 알렸다. 비가 조금씩 새는 강당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우리 선생님들은 둥그런 상에 둘러앉았다. 하루를 반성하는 자리. 우리 모두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주님의 은총 안에 평온한 밤을, 달콤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새벽 6시. 해는 뜨지 않았지만 날이 개고 있음을 느꼈다. 우린 긴급회의를 했다 “다리가 끊기지만 않았다면 오늘 아이들을 보낼 수가 있을 텐데요.” “다리가 끊겼다면 돌아서 시내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다행히도 다리는 끊기지 않았다. 그날 날씨는 참으로 화창했다. 지난 밤의 수마가 할퀴고 간 흔적들만 없었다면 그날 밤의 일은 아무도 믿지 않았으리라. 여름 신앙학교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우린 모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영화 같던 여름 신앙학교가 끝난 후 주일학교는 조금 한가해졌다. 한가해져서일까. 내 마음속에 나태함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나의 나태함은 더 나태함을 낳았다. 성당에서의 생활은 더 이상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나는 또다시 내 안에 담을 쌓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세 번째 사랑은 달디단 사랑의 맛뿐만 아니라 쓰디쓴 사랑의 맛도 알게 해 주심이었다. 성당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기쁨을 주진 않았다. 주일이면 성당을 거르지 않고 나가긴 했지만 그저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고, 나의 신앙생활은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난 누군가의 이야길 엿듣게 되었다. ‘신앙의 달콤함을 느꼈다면 언젠간 극심한 고통이 올 것이다.’ 난 깊은 감명을 받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지 몇 달. 인터넷 다음 카페의 죽산 성당 게시판에 본당 베드로 학사님이 올려 놓으신 ‘무제’라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생활(삶)은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쁨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의 달콤함을 맛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신앙의 달콤함만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의 달콤함을 느끼셨다면 언젠가는 극심한 고통이 올 것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극심한 고통이 왔다고 해서 신앙을 포기한다면 영영 하느님과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극심한 고통을 극복한다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기쁨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희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주님께선 나에게 아주아주 크신 사랑을 주셨다. 진정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용기를.
2001년 난 또다시 정열이 넘치는 신임교사가 된다. (2001년부터는 중고등부 교사를 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