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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9,23-26
순교자의 밤을 맞아 우리 모두 성지순례를 떠나도록 하겠읍니다. 모두 눈을 감아 주십시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우리 마음의 성지순례를 떠나도록 하겠읍니다.
제가 읽어드리는 것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려보도록 하십시요. "오늘은 포졸들이 우리 동네에 들이
닥쳤읍니다. 박해를 피해 정든 고장, 일가친척, 관직, 명예, 재산 다 버리고 이곳 첩첩산중에 어렵사리
정착했는데……, 포졸들이 우악스럽게 손을 묶습니다.
가재도구는 다 팽개쳐지고 아이들은 급작스런 상황에 울기만 합니다. 피난 살이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얼마되지 않지만 그나마 쓸만한 것은 포졸들이 다 챙겨갑니다.
이제 어떻게 될지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감옥에 들어왔읍니다. 두세평 남짓한 어두컴컴한 방에 십여명이
함께 있으며 그가운데는 젖먹이들도 있읍니다.
상처가 곪아 터지는 냄새와 바닥에 깔린 짚단이 썩는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읍니다. 머리를 가누기에도
힘든 큰 칼과 발에 채운 족쇄 때문에 잠을 청하기는 커녕 그냥 앉아 있기에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입니다. 한줌씩 잡히는 이를 잡아먹는 이들도 있고 썩은 짚단이나
상처에서 나오는 구더기를 잡아먹는 이들도 있읍니다.
어떤 이는 흙을 한줌씩 집어 먹다가 손가락 끝이 헐어 피가나게 되자 그 피딱지를 뜯어 먹기도 합니다.
언제 이러한 고통이 끝나게 될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오늘은 관헌에 끌려 나갔읍니다.
관장이 배교하라고 소리칩니다. 못하겠다고 하자 무시무시한 고문이 시작됩니다. 곤장을 치기도 하고
주뢰를 틀기도 합니다.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리기도 하며 바닥에 유리를 깨뜨려 놓고 그위에 무릎을
꿇린다음 짓누르기도 합니다.
줄을 다리에 감은 다음 양쪽에서 당겼다 놓았다 하여 줄이 살속을 파고 들어가게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문중에 뼈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이고 창자가 나오거나 골수가 나오는 이들도 있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가족을 대신 위협하는 것입니다. 아이들,부인 혹은 남편, 부모를
대신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 드디어 처형장으로 끌려갑니다. 두 귀에는 화살이 꽂혀있읍니다.
거리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나와 있읍니다. 우리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욕을 하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며 침을 뱉기도 합니다. 한강변 모래사장에 도착했읍니다.
머리를 숙이지 못하게 머리카락을 나무에 매답니다. 망나니가 큰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춥니다. 절친한
친구 하나가 망나니에게 제발 한칼에 베어 달라고 돈을 주는 것이 보입니다. 망나니가 칼을 크게 치겨듭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려나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것을 나는 압니다."
성지순례 잘들 다녀오셨지요? 지금 읽어드린 것은 제가 마음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여러 순교자들의
편지를 편집하여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모아 놓은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우리 사회에서 "족보찾기 운동"이 여러 계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키며 전개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없이 너무 편리위주로,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데
대한 반성이 외적 운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가 뿌리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어느것 하나 태어남을 받지 않은 것이 없듯이 인간도 자기
존재의 근원과 뿌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의 근원과 뿌리에 대한 깊은 자각 없이는 자신의 현존재 또한 위태롭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교회안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우리 가톨릭 신앙인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읍니까?
바로 우리의 순교자들입니다.
온갖 환난과 괴로움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칠지언정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바로 이 땅의 순교자들입니다.
반쯤 떨어진 목을 치켜들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를 두손으로 받쳐들고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분들,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포졸에게 부모로서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그래도 배교할
수 없다고 하던 분들, 산채로 묻으려고 자신들위로 흙을 퍼붓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올리시던 분들,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도 차라리 바닥의 흙을 한줌 줏어먹을 지언정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분들, 유일한 식량이라고는 곪아터진 상처에서 나오는 구더기와 썩어 문드러진 짚단이 전부였던
그분들, 그리고도 배교하기는 커녕 같이 잡혀있던 교우들을 서로 격려하던 그분들,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모든 고문과 역경과 죽음의 위협까지도 물리쳤던 그분들, 바로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주신 분들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신 분들이 부모님들이라면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 신앙을 전해주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너무 사치스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까지 전달된 신앙인지에
대해 많은 반성이 있어야 하겠읍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세태가 변했다는 이유로 우리의 순교자들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너무 뒷전으로
밀어낸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그분들의 삶을 가까이 느낄 필요가 있읍니다.
그분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오늘날 되살릴 필요가 있읍니다.
순교자들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성지순례를 많이 하고 순교자 현양 대회에 빠지지않고 참석하며
순교자들이 아니면 신앙생활을 못할것처럼 떠들고 다닌다고 해서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살지못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기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맹이
빠진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일상에서 순교하는 삶, 모든 것안에서 하느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 바로 오늘날의 순교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때 그 옛날 우리의 순교자들이 목숨바쳐 지킨 신앙을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퇴색됨 없이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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