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형제회(프란치스꼬회)는 1209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1182~1226)에 의해 창설되었다. 성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분방하고 야심많은 청년기를 보내던 중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도와 보속의 회개 생활을 시작하였다. 성인의 모범에 감명을 받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형제들의 수는 많아져 결국 공동생활의 필요성에 의하여 1200년 4월 16일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간단한 회칙을 구두로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1223년 회칙을 재작성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대칙서로 인준 받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날에도 프란치스칸 생활의 기초가 되고 있는 작은 형제들의 회칙이다.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할만큼 철저히 복음적 삶에 투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난과 겸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기에 당시의 엄격하였던 여러 수도회들과는 달리 회의 명칭을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고 하였다. 그리고 1211년에는 관상 수녀회로서 프란치스꼬 제2회인 "글라라회"를, 1221년에는 평신도들을 위해 제3회인 "재속 프란치스꼬회"를 세워 많은 형제 자매들이 대가족을 이루게 되였다. 또한 성인은 철저히 겸손의 길을 걸었으며.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깊은 관상과 기도 끝에 오상(五傷)까지 받으신 성인의 신심은 많은 이들을 복음적 생활에로 이끌어 왔다. 지금까지 약 800여 년에 달하는 프란치스꼬회의 역사를 통해서 본회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을 모시게 되었다.

 

한편 한국 진출은 1937년 9월, 캐나다 관구 소속의 두 형제가 입국하여 대전시 목동(현재의 수련소)에 자리잡고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일제 치하의 고초와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쇄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돌아와 파괴된 수도원을 재건하고 본격적인 한국에서의 프란치스칸 생활을 전개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 준관구>로 승격되고. 1987년 12윌 10일,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하여 층본부로부터 "한국 순교 성인 관구"로 인가받아 오늘날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어느 크리스챤치고, 아니 어느 영성 학파에게 있어 복음적이고 그리스도중심적인 영성이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할 지는 모르지만, 프란치스칸 영성의 복음적이고 그리스도중심적인 영성은 수도생활 역사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기존 수도회들의 회칙을 받아들이기를 강력하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곤 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의 복음적 성소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프란치스꼬는 긴 회개여정 끝에 복음의 메세지들을 통해 자신의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은수자의 옷을 입고 은수자처럼 살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뽀르찌웅꿀라 성당에서 "사도들의 파견"(Missio Apostolorum)에 관한 설교(마태 10,7-13)를 들은 후 그의 성소는 보다 구체화되고 확고하게 된다. 여기서 프란치스꼬는 주님께서 그를 사도들처럼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고 파견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싶어 하던 바이다"(1첼라노 22; 대전기 3,1; 세동료 25)라고 외쳤다. 

이 순간에 프란치스꼬가 즉시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고자 하는 첫동료들이 생기자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복음서를 통해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첫 동료들과 함께 산 니꼴로 성당으로 가서 그 당시 만연했던 대중신심인 소위 "사도들의 제비뽑기"(Sortes Apostolorum)를 통해 복음서를 세번 펼쳐보았다. 이렇게 해서 뽑은 세 구절은 1)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나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 2) "여행중에 아무것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루가 9,3). 3) "나를 따르려면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 16,24) 였다.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주제였고, 이에 프란치스꼬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와 앞으로 우리를 따르게 될 이들의 회칙입니다"(대전기 3,3; 세동료 29; AnP 11)고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성소를 찾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주님 친히 가르쳐 주셨다"(유언)고 말한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수도생활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한 반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2회칙 1,1)으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일반화 되어 있었던 정주적(定住的)인 수도승적인 양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순회설교적인 생활 양식을 기본 생활양식으로 삼게 된다. 프란치스꼬의 글 안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혹은 "사도가 말합니다."라는 표현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초대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란치스꼬가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시 교회가 갖고 있던 그리스도 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프란치스꼬의 시대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시기였고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황금기인 시대였다. 지상의 왕권은 교황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시대를 풍미한 그리스도관은 부활,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계시면서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 통치하시고, 영광중에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가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꼬와 그의 제자들이 따르게 될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결국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못박히셨던 그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관은 교회와 모든 크리스챤에게 회개를 거듭 요청하게 된다.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첫 발설말씀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었다. 프란치스꼬는 자신과 초기동료들을 "아씨시의 회개자들"이라 불렀다. 프란치스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 회개는 마음의 변화요, 의식의 변화, 시각의 변화였다(참조: 유언 1-3). 실제로 그와 초기동료들이 교황님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고 처음으로 받은 공식소명은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들은 먼저 자신들이 회개하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삶으로 보이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할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 영성의 두번째 측면은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이라는 것이다. 생활양식 자체가 복음서의 예수와 사도들의 삶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의 수도생활의 역사를 보면, 어떤 수도생활 양식은 성직자 중심이고, 또 어떤 생활양식은 극히 수도승적(평수사 중심)이었다. 프란치스꼬는 성직계에 속하든 평신도계에 속하든, 또 출신 신분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모두를 받아들였다. 마치 예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계급과 신분의 지장없이 불리움을 받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란치스꼬는 여자들을 위한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으며(제2회: 글라라회), 평신도들을 위해서도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다(제3회: 재속 프란치스꼬회). 이리하여 신분, 계급 여하에 상관없이 모두가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실현에 옮긴 셈이다. 

 

프란치스칸의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생활이다. 프란치스꼬는 시초부터 자신의 성소가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를 교회가 가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초기 형제들이 선택한 생활양식을 교황성하로부터 인준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의 복음적 운동들은 프란치스꼬처럼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사는 삶을 주창하였지만, 교회에 반기를 들며 교회 없는 삶의 구조를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을 범하기도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러한 이단적인 오류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근본적인 이유를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친히 사도들을 주추삼아 세운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확인되지 않는 삶이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삶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형제들이 교회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최대한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명했으며, 입회의 조건에 있어서도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성사"에 대한 시험을 전제로 하기도 하였다. 어떤 속화되고 불쌍한 사제를 만난다해도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도 가르쳤다. 이렇게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과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분리불가능한 요소였다. 그래서 그는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형제들은 거룩한 교회의 발 아래 항상 매여 순종함으로, 가톨릭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가 굳게 서약한 가난과 겸손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합시다"(2회칙 12,4).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이끌어준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는 프란치스칸적인 방법은 어떤 사업이나 거창한 활동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삶으로써 자신들이 크리스챤이요 회개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는 어떤 수도회들의 카리스마처럼 어떤 사업이나 고유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도 근본적으로 복음을 삶으로써 그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생활 혹은 삶"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이 생활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은..."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사업이나 활동보다는 형제적인 삶, 회개의 삶, 복음적 생활이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업이나 활동은 삶의 결과로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삶을 통해 스스로 복음화 되고 또 복음화 시키는 것이 작은형제들의 제일차적인 과제일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불리움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로 열려있기 마련이다. 프란치스꼬 역시 초기부터 이러한 선교적 열정에 북받쳐 수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났으며, 순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코자 하였다. 그 결과 성지탈환의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 그는 동방으로 건너가 홀몸으로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으로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사도좌는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부요 스승의 선교적 모범은 작은 형제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서 늘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선교적 열정의 덕분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교와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 선교 프로젝트들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프란치스칸 성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꼬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일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꼬는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크리스챤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들이든 모든 이가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 프란치스꼬가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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