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1999.1.4
검사 밑에 법의학자?
법의학 배출구 틀어막는 수사기관 종속구조… 검시제도 30년동안 발전 없어

(사진/외국에선 변사사건이 나면 검시조사관들이 즉시 출동해 가족 친지 목격자 경찰관 담당의사 등을 상대로 사망 경위를 조사한다.)

텔레비전에서 <형사 퀸시>라는 외화 시리즈를 방영한 적이 있다. 살인사건 현장을 누비며 형사 콜롬보 뺨치는 활약으로 범인을 잡아내는 주인공 퀸시는 그러나 분명히 의사였다. 시청자 가운데는 “저게 의사냐 형사냐”고 의아해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의사이자 형사인 셈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법의관(Medical Examiner)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직종이 없어 방송사에서도 궁여지책으로 ‘형사’로 번역했다.

변사현장 감식, 대부분 경찰관이 대행

미국에서 발달한 법의관 제도는 변사사건의 1차 담당자를 의사인 법의관으로 정하고 있다. 법의관사무실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교대로 근무하면서 변사 신고를 받는다. 신고가 들어오면 법의관을 돕는 검시조사관(Medical Examiner Investigator)들이 긴급차량을 타고 즉시 출동해 가족 친지 목격자 경찰관 담당의사 등을 상대로 사망 경위를 조사한다. 현장과 시신을 살핀 뒤 타살이거나 타살 의혹이 강할 때는 법의관에게 연락한다. 이 경우 부검은 법의관 주도로 강력계 형사와 경찰 증거수집반이 참여한 가운데 이뤄지며, 법의관은 부검 뒤 더 필요한 자료를 직접 또는 검시조사관을 시켜 조사한다.

법의관은 일정 기간 수련을 거친 법의병리학 전문의로 구성되며 수석법의관은 역시 법의병리학 전문의 가운데 자치단체장이 지명한다. 검시조사관은 수사관이나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사람이 6달∼1년의 법의학 훈련을 거쳐 임명된다. 이 제도는 미국 51개 주 가운데 23개 주에서 시행하고 있으며 다른 주로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법의학 전문가인 법의관이 변사사건 조사를 직접 담당하고 신속한 조사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의관의 몫을 검사가 맡고 있다. 가뜩이나 업무량이 많은 우리나라 검사가 직접 변사사건 현장에 나서는 경우는 전체의 10% 미만이다. 대부분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경찰관이 대행하고 있다. 검사든 경찰이든 시체를 살피는 일은 의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나라에 법의학 전문지식을 갖춘 의사는 거의 없다. 현행법은 치과의사와 한의사도 이를 대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의학 전문가가 직접 다루는 것은 검사가 타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부검을 의뢰한 경우뿐이다. 미국의 법의관 제도처럼 광범위한 변사사건을 전문가가 다룸으로써 영아사망에 대한 연구나 장기 및 조직 기증, 전염병 역학조사, 직업병 검토, 보험처리 등 형사사건 이외의 분야에 도움을 줄 기회가 아예 봉쇄되고 있는 것이다.

사건 수사에서도 법의학자와 수사기관 사이에 원활한 공조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현장조사는 경찰의 몫이고 부검은 법의학자의 몫이라는 이분법이 지배한다. 이 때문에 정보의 상호 교류도 거의 막혀 있는 실정이다. 법의학자가 수사기관에 종속된 구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제도적 맹점은 법의학자 배출구를 틀어막고 있는 요인이다. 한 법의학자는 “의대를 나와 수사기관 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우리나라와 제도가 비슷한 일본은 이 문제에 나름대로 해결책을 마련했다. 법적으로는 검사가 지휘권을 갖는 대신 사회적 지위에서는 법의학자를 우위에 둠으로써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일본에서 법의학자는 통상 검사를 낮춰 부른다. 이런 식으로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면 상호작용이 그만큼 쉬워지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법의학은 황량한 불모지대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검시제도는 국민소득 1천달러 시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을 정도다. 제도개혁을 바라는 법의학계의 목소리는 부검실 벽만 울릴 뿐이다. 한 법의학자는 이렇게 꼬집는다. “사회적 권력구조에서 우위를 점한 법조계는 막연히 검사의 지휘권을 고수하려 한다. 다른 쪽 당사자인 의료계는 법의학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죽은 자는 투표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은 이 문제를 방치한다.”

박용현 기자

piao@ma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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