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은 그 나라의 정치 형태와 관련을 갖고 발달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법의학 역사는 이조시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매우 찬란한 법의학이 꽃 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관리들이 검시를 할 때는 반드시 현장에 나가 임검케 하는 등 무원록에 따른 살상검증을 강조하였다. 즉 초검이라 하여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지방 관리가 먼저 시체를 검사한 후에 상부관에게 무원록의 시상식에 의한 검안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초검관은 그 인근 지방관에게 제 2차의 복검을 의촉하게 된다.
이때 초검관은 자기가 상부관에게 보고한 내용을 절대로 누설치 못하게 벌칙을 정하고 있으며 복검관은 독자적으로 검안서를 만들어 초검관과 같은 상부관에게 제출한다. 상부관은 초, 복검관의 의견이 일치될 때는 그것으로써 그 사건을 처리하였으나 만일 의견의 차가 있을 때는 상부관으로부터 다시 삼검을 하기 위하여 삼검관을 보내었다. 삼검관으로는 보통 중안의 형조에서 검관을 파견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관리를 보내어 다시 검험하였다. 이들의 검안과 초, 복검관의 것을 침작하여 최종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검시한 결과의 사인은 42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것, 말에 밟혀 죽은 것, 벼락에 맞아 죽은 것, 술 취해 죽은 것 등등으로 구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438년(세종 20년)에 신주무원론이라는 책이 중국의 무원록을 번역하여 발행되었고 1456년(세종 38년)에 심리록이, 1792년(영조 24년)에 증수무원록이, 1801년(순조 원년)에 검요, 시장 등의 법의학 서적이 발간되었다.
이 책들이 후일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법의학의 기틀이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구택규가 개편한 증수무원록은 갑오혁신 후에 서구식 제도에 의한 재판소가 구성된 후에도 이것이 계속 사용된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법의학 업적은 참으로 찬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법의학이 처음으로 강의된 것은 기록에 의하면 1925년 4월, 당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일인교수에 의하여서이며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1930년에 최진 교수에 의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강의된 것이 시초이다. 그후 광복이 되어 김만달 교수에 의하여 대구의과대학에 법의학교실이 창설되었으며 미군치하에 법의학실험소가 1946년 4월에 개설되어 곽영우 박사가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전술한 실험소가 치안국 내에 감식과로 개편되었다가 1955년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독립되면서 법의학과를 개설, 이 과가 한국의 법의학을 연명해 왔던 것이다.
광복 후 한국의 의학교육은 과거 일인들이 하던 독일식 의학교육에서 미국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때 많은 의학교육 책임자들이 앞을 다투어 미국의 의학교육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6.25사변과 더불어 이미 개설되었던 법의학교실들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세브란스 의대의 최진 교수께서는 연로한 탓으로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 경북대학교 채종민 법의학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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